History of Korean Micro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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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Micronations started with the introduction of public internet service in the 1990s, and have developed until now.

Before Micronations(~2003)

2003년 이전에는 한국 초소형국민체[1] 계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국가보안법의 영향도 있었을 뿐더러 1995년이 되서야 개인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 이용이 가능해졌기에 외국 초국들의 존재를 알기란 쉽지 않았다.

Era 0(2003~2008.12.16)

한국 초국계가 첫 발을 내딛은 시기이다. 이 시기의 초국들은 주로 미국과 일본 등 친숙한 국가의 초국을 본뜨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김용호 씨에 의해 한국 최초로 초소형국민체라는 이름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특히 인터넷 기반 초국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Era 1(2008.12.16~2013.02.09)

현재 실질적인 역사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신쥬신 연방 왕국을 중심으로 초국계가 운영되었다. 이 시기의 첫 초국은 호파소 민주공화국이다. 호파소 민주공화국은 2008년 12월 16일 사이버 초국으로 세워져, 한국의 정치 체제를 대부분 차용하여 운영되었다. 이후 신쥬신 왕국(신쥬신 연방국의 전신)이 2009년 2월 20일 오프라인으로 건국되었고, 2009년 3월 8일 신쥬신 왕국 카페가 설립되었다.[2] 2009년 5월 24일, 신쥬신 왕국에서 신쥬신 연방국이 되면서 새로운 카페가 설립되었다.[3] 한편, 1기말인 2012년 2월 9일에 현재 대카르토인민민주공화국의 최초 형태인 "고대 카르토쉬 부족"이 창건되었다.

Era 1.5(2013.02.09~2015.07.26)

신쥬신 연방국 붕괴 이후 신초련 재활성기까지의 시기이다. 중간 중간에 카르토[4] 나 백제 등 소규모 초국들이 활동했으나 남은 기록도 거의 없을 뿐더러 애초에 초국 활동 자체가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Era 2(2015.07.26~2016.12.18)

신초련 전성기이다. 세르게이 담딘수렌[5] 이 3대 총장으로서 신초련을 중심으로 초국계를 부흥시키며 시작되었다. 에르카베츠 대표부 2대 총장에게 총장직을 넘겨받은 세르게이 총장은 적우민주공화국과 카시야 민주공화국

Era 2.5(2016.12.18~2017.09.20)

안치윤 제 8대 신초련 사무총장의 총장 권한대행 독단적 임명, 김동기(한비자)와 이건영(도라시니)의 정치 패싸움으로 싸움터가 된 게시판이 화근이 되어, 주요 멤버들이 나가고 신초련이 붕괴되는 이른바 12.17 초국계 대붕괴 사태(12.17~12.19)가 발생했다. 이후 신초련은 회생 불가능 상태가 되었고, 9대 총장 선거를 통해 페르트체흐가 당선되며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으나, 결국 정대성이 한빛 군정을 선포하면서 신초련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Era 3(2017.09.20~Current)

최초의 통일 초국 계획이 시행되며, 수능이 끝나 볼코프, 바키라, 크론의 공백기가 끝나며 다시 활성화되는 시기로, 하눌아름대카르토, 마진 초미니 공화국, 프리타운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4초국 체계로 안정된, 제 3 번성기이다. 이후 잠시 크론 복귀를 놓고 갈등이 심화되자 헤르만 디트리니아는 즉시 초국 회의를 소집, 연합 구상 등의 전면 폐기를 선언하고 1년 간 잠적 생활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12월 17일 디트리니아의 갑작스런 복귀 그리고 초국계 연명 정책의 발표와 함께 초국계는 다시 활성화 되었다. 현재 초국계는 기업형과 실험형으로 나뉘어 활동 중이다.

References

  1. 역사 부문에 있어서만 이 용어를 쓰도록 하곘다 - 미르도프 크론
  2. http://cafe.naver.com/newjusinnkma
  3. http://cafe.naver.com/newjusin
  4. 당시 카르토쉬 애막.
  5. 당시 세르게이 페트로프.